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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위해 생명 불태운 과학가

2017년05월19일 14:44
출처: 연변일보   조회수:8

 

머리말: “인간의 생명은 력사의 물결속에서 잛디짧은 한순간에 불과하기에 우리가 물결치는대로 흘러간다면 평생을 헛되이 보낼수밖에 없지만 작디작은 물보라가 되여 세차게 흘러간다면 사품치면서 기여자들의 줄기찬 물결속에 합류하여 력사의 발전을 앞으로 추동할수있다. 나는 이것이야 말로 일생동안 가장 자랑스럽고 자부심을 느낄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1988년 황대년의 입당지원서에서

 

2017년 1월 8일, 과학의 별하늘에서 눈부신 새별 하나가 조용히 떨어졌다.

중국 장춘의 길림대학 지질궁. 동료들은 바삐 뛰여다니는 그의 익숙한 모습을 더는 찾아볼수없었고 학생들은 부드럽고도 온화한 그의 가르침을 더는 들을수없었으며 숙직을 서는 할아버지는 507호 사무실 들창가에 장밤 켜져있던 등불을 더는 볼수없게 되였다……

7년전의 그 겨울날, 그가 흩날리를 눈꽃을 무릅쓰고 영국으로부터 귀국하여 이곳에 성큼성큼 들어설 때 해외에 충격을 주었다. 한 외국매체는 “그의 귀국은 어느 한 나라 그해 항공모함연습의 전반 함대로 하여금 100해리 후퇴하게 했다”고 보도했다.

7년동안 이 과학의 궁전에서 그는 초속로로 운동하는 회전자마냥 과학기술로 나라를 진흥시키는 주축을 둘러싸고 하나 또 하나의 첨단과학기술 프로젝트를 세계의 최전방으로 밀고 나아갔으며 58세의 절점에 이르러 갑자기 멈추었다.

그가 바로 국제적으로 유명한 전략과학가 황대년이다.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추억은 아직도 여전히 남아있다—

우리는 지질궁 앞으로 다가섰다. 붉은 기둥에 흰 란간, 돌사자와 화표는 공화국의 풍운이 출렁이던 한단락 력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66년전, 새중국의 첫 지질학교인 동북지질전문학교가 이곳에서 탄생했으며 갖은 저애력을 물리치고 금방 영국으로부터 귀국한지 얼마 안되는 리사광이 초대 교장직을 맡았다. 그 당시의 중국은 오래동안 가난과 퇴세에 처해있었으며 리사광은 뼈에 사무치는 아픔을 지니고 귀국했었다. 오늘날 세계 제2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의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있는 가운데 황대년이 귀국을 선택하고 또한 이를 위해 몸을 바치게 된것은 또 무엇때문이였겠는가? 숙명적인 력사적 륜회일까? 아니면 중화민족의 넋속에서 영원히 이어지면서 막을래야 막을수없는 힘이라고 할까?

끝없는 그리움과 숭경의 마음을 지니고 우리는 그의 짧지만 이채로운 인생속에 들어갔다.

 

(소제목) “과학연구미치광”—“중국이 대국에서 강국으로 되자면 많은 ‘과학기술미치광이’가 필요하며 내가 이 가운데의 한개 성원이 될수있다는것으로 아주 만족한다!”

길림대학 지질궁, 507호 사무실.

사진속의 황대년은 품위가 있고 자상했고 입가가 살짝 올라갔으며 금테안경 너머로 끈질긴 눈길이 빛나고 있었는데 마음속에 열정을 간직한 사람임을 대뜸 알아볼수있었다.

우리에게 황선생님의 이야기를 들려줄것을 부탁하는 우리의 말에 황대년의 생전비서 왕욱함의 눈시울은 금방 붉어진다.

요즈음 왕욱함은 조금 정신이 어리터분한 상태라고 한다. 

그는 자기가 또 황선생님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사무실에서 나와서 그의 어깨를 툭 치고는 또 다른 일을 보러 가는 꿈을 꾸었다고 우리에게 말하는것이였다……

그는 황선생님이 떠나가지 않은것 같다면서 지난번 선생님을 모시고 북경에 가서 회의에 참가하던 때의 장면이 어제같다고 말했다. 

그때 창문카텐을 닫고 에어컨을 켜자 널찍한 회의실의 떠드는 소리가 점차 가라앉았다.

투영 스크린앞에서 황대년은 취한듯이 자리에 있는 전문가들에게 그 자신의 “심부탐측 관건적 의기장비 연구제작과 실험”프로젝트의 PPT를 실연해보였다. 그의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몸에서 빙편의 청량한 냄새를 맡을수 있었는데 황교수가 속효구심환을 복용했던것이였다.

2016년 6월말, 북경에 가서 이 회의에 참가하기 전날에 황대년은 갑작스레 사무실에서 졸도했다. 
황선생님의 이야기를 들려줄것을 부탁하는 우리의 요구에 황대년의 생전비서 왕욱함의 눈시울은 금방 붉어진다.

요즈음 왕욱함은 조금 어리마리한 상태라고 한다.

그는 자기가 또 황선생님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사무실에서 나와서 그의 어깨를 툭 치고는 또 다른 일을 보러 가는 꿈을 꾸었다고 우리에게 말하는것이였다…

그는 황선생님이 떠나가지 않은것 같다면서 지난번 선생님을 모시고 북경에 가서 회의에 참가하던 때의 장면이 어제 같다고 말했다.

그때 창문카텐을 닫고 에어컨을 켜자 널직한 회의실의 떠드는 소리가 점차 가라앉았다.

투영 스크린앞에서 황대년은 취한듯이 자리에 있는 전문가들에게 그 자신의 “심부탐측 관건적 의기장비 연구제작과 실험”프로젝트의 PPT를 실연해보였다. 그의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몸에서 빙편의 청량한 냄새를 맡을수 있었는데 황교수가 속효구심환을 복용했던것이였다.

2016년 6월말, 북경에 가서 이 회의에 참가하기 전날에 황대년은 갑작스레 사무실에서 졸도했다.

황대년이 정신을 차리고 비서와 한 첫마디가 “다른 사람과 말하지 말아주오”였다. 왕욱함은 황선생이 그들을 데리고 3일 밤을 새며 정리해낸 산더미 같은 재료들을 보면서 감히 찍소리도 못했다.

프로젝트검수회의 준비시간이 너무 빠듯하여 프로젝트책임자로서 그는 련속 3일 저녁을 새우면서 부족한 부분을 찾아 보충하였다. 회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는 숨쉬기 바빠하며 안절부절 못했다. 그는 습관적으로 항상 갖고다니는 검은색 가방을 열어 그속에서 속효구심환 약병을 꺼내 입에 넣고서야 회의장에 들어갔다…

“프로젝트성과가 이미 국제선진수준에 도달했다” 황대년과 그의 팀원들은 너무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다.

그런데 그의 생명이 이미 초읽기에 들어간줄을 누구도 몰랐다.

그때 일을 생각할적마다 왕욱함은 “진작 이럴줄 알았으면 누가 뭐라 해도 황선생을 말렸을것이다”며 자신을 원망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말리지 못했을것이다.

생전의 그의 위챗모멘트를 뒤져보면 2016년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에 그는 “… 진정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항상 사업발전과 관련이 있는 우정군체에 중시를 돌리게 되고 ‘지기’에 대해서는 일찍 만나지 못한것을 한탄하며 유감스러워하며 특별한 우정을 쌓게 된다”는 내심독백을 적었다.

그의 마음속에 “련인”은 과학이였다.

이에 과학기술부 해당 책임자는 “당시 우리는 지구탐측프로젝트를 “12.5”시기에 돌파할 계획이였는데 선두주자가 없어 애간장을 태우고있을 때 누군가 귀국한지 얼마 안되는 황대년을 추천했다”며 인상이 깊다고 말했다.

해당 책임자는 “장춘에 가서 그를 찾았는데 두번째만에야 겨우 말문을 열었다”며 프로젝트 규모가 억원을 넘지만 황대년에게는 일전 한푼도 차례지지  않기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황대년은 “그럽시다” 하며 아주 통쾌하게 대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황대년이 왜 이 프로젝트를 흔쾌히 대답했는지 모를것이다. 사실 황대년이 겨냥한것은 비행기, 선박, 위성 등 이동플랫폼에 장착한 “천리안”처럼 지하의 매개 구석을 다 궤뚫어볼수 있는 첨단기술이였다. 일찍 지난 20세기 90년대 미국, 영국 등 나라에서 이 기술을 리용해 군사방어와 자원탐사를 진행했다.

사람들이 더욱 모르고있는것은 몇년전 황대년의 부모가 잇달아 세상을 떠났을 때 그가 국외에서 부모를 잃은 고통을 참으면서도 귀국하지 못한것은 바로 이 기술을 돌파하기 위해서이다.

하루도 기다릴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사무실에 가두어놓고 낮과 밤을 이어가며 과학연구구상을 설계했다. 그는 “이동플랫폼, 탐측설비 두개 로선으로부터 가속추진”을 제기했으며 길림대학에 보고서를 올려 이동플랫폼탐측기술쎈터를 설립하고 “초부하(重载荷)지능화물리탐광 전용무인헬기연구제조”과제를 내놓았다.

비행기 원형이 없자 그는 련속 수개월 동안 틈만 나면 무인기모델판매가게에 가서 이것저것 보면서 실험해보았다. 가게에서 문을 닫는다고 해도 떠날념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아예 돈을 주고 사서는 직접 모델을 사무실까지 안고 왔다.

비행기 격납고가 없자 그는 지질궁문앞의 공지에서 팀원들을 이끌고 함께 땀을 흘리며 한달 정도 분투했다.

비행기 격납고가 건설되여 두번째날에 사고가 발생했다.

“이는 비법건축물이기에 반드시 허물어야 한다”며 트럭을 몰고와서 당장 허물어버릴 기세였다.

알고보니 그들이 심사비준절차를 모르고 학교에만 보고서를 알리고 관련 수속을 밟지 않았던것이다.

황대년은 허물어서는 안된다, 이미 보고서를 제기했다며 트럭앞에 가서 드러누웠다. 해빛에 눈도 바로 뜨지 못한채 그대로 드러누웠다. 그의 몇몇 제자들도 그의 곁에 가서 누웠다. 세계급 유명 과학가의 거동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이 소문은 삽시에 퍼졌다. 어떤 사람들은 황대년을 “미치광이”라고 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아하면서 중국이 대국으로부터 강국으로 발전하자면 많은 “과학미치광이”들이 소요된다며 그중에 자기가 있다는데 만족을 느낀다고 말했다.

미치지 않으면 악마가 될수 없다.

이런 “악마”들이 있기에 중국이 이 프로젝트 데이터 획득능력 및 정밀도와 국제 연구개발속도가 최소 10년이 단축되였으며 계산법에서는 국제선진수준에 도달할수 있었다.

이런 “악마”들속에서 7년 동안 그는 신비하고 환상적인 “대년동화”-교차, 융합을 창조했다. 이는 황대년이 귀국한후에 제기한 새로운 과학연구리념이다.

탐측의기 전문가와 협력하여 심부탐측의기장비를 개발했고 기계분야 전문가와 협력하여 초부하물리탐광 전용무인기를 개발했으며 컴퓨터 전문가와 협력하여 지구물리빅데이터처리 및 해석을 개발했다…

충돌속에서 돌파를 모색하고 불일치속에서 증량을 확대했다. 교차, 융합 과정에 일어난 “화학반응”과 “렬변반응”은 끝없는 상상의 공간을 방출했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전략과학가로서 황대년은 진정한 핵심기술은 돈주고 살수 없다는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다. 중국이 새로운 세계과학기술경쟁 입장권을 가졌지만 혁신이라는 이 “굽인돌이에서 앞차 초월”기회를 단단히 틀어쥐여야만이 력사의 조류를 따라잡을수 있는것이다.

과학은 엄밀하지만 기발한 발상으로 성공이 필요하다. 발자크는 진정한 과학가는 반드시 환상가여야 한다고 말한적 있다.

황대년이 바로 이런 “환상가”이다.

“길림대학에 남극과학고찰에 참가하는 학자가 있는데 혹독한 추위,  계곡, 전시단대 극한 조건에서 통신, 교류와 작업을 완성하는 전지형 만능차를 연구제조할수 없을가?”

“’클라우드원격통제’기술발전이 아주 빠르다. 아직까지 국내에서 공백인 야외작업의료간호차를 개발할수 없을가?”

“아직까지 남극내륙지구에서 빙하의 기반암 핵심을 드릴할수 있는 나라가 없다. 중국이 해양자원과 안전분야에서 건설공정학원, 환경자원학원과 공동으로 무언가를 할수 없을가?”

……

귀국한지 반년이 넘는 동안 황대년은 각 분야의 력량을 총괄하여 방대한 길림대학 교차학부 설계도를 그렸다.

그의 호소하에 왕헌창, 마방무, 최군홍 등 허다한 해외에서 비교적 높은 지명도를 갖고있는 “천인계획” 전문가들이 분분히 팀원으로 되였다. 2016년 9월, 방사지학부, 의학부, 물리학원, 자동차학원, 기계학원, 컴퓨터학원, 국제정치학부 등 비행정화 과학연구특구가 초보적으로 형성되였고 황대년이 길림대학 신흥교차학과학부 초대 부장으로 되였다.

현임 길림대학 교차학부 부부장인 “천인계획” 전문가 마방무는 “대년의 전략구상은 위성통신, 자동차설계, 빅데이터교류, 로보트개발 등 분야의 과학연구와 관련되고 전통학과의 기초에서 파생할수 있는 새로운 방향으로서 수천억원의 산업프로젝트를 추동할수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2.0시대에서 배회하고있을 때 황대년은 이미 4.0시대 지어는 더욱 먼 시대에  서있었다고 말했다.

황대년의 "열광"은 이처럼 조국으로 하여금 과학기술상 여러 곳의 "커브길에서 앞차를 추월하게 했다"-

7년 동안 황대년은 400여명 과학가들을 거느리고 여러개의 "중국 제일"을 창조하여 우리 나라  "우주순찰과 지구탐지, 해저잠수"를 위해 여러가지 기술적 공백을 메웠다. 그가 책임진 제9프로젝트인 "-심부탐측 관건의기 장비 연구제작과 실험"의 과제결론을 표징으로 중국 "심부탐측기술과 실험연구"프로젝트의 5년 성과가 지난 50년을 초과하였으며 심부탐측능력은 이미 국제 일류 수준에 도달하였고 국부적으로 국제 선두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국제학계는 중국이 정식으로 "지구심부시대"에 진입하였다고 경탄을 금치 못하고있다.

이 도약의 배후에는 바로 황대년의 이 같은 "과학연구미치광이" 가 뒤받침되여있다.


"변명황랑(拼命黄郎)"-"나는 하루를 살면 하루를 버는것으로서 언제 쓰러지면 그 자리에 묻어달라"

황대년의 사무실 차탁우의 화분에는 담황색의 국화가 조용히 피여있었다. 쏘파가 문쪽 가까이에 있는 흰칠판에 씌여진 여러가지 공식과 도형에 주인의 당시 학술사고가 클로즈업되여있었다.

벽에 걸려진 한장의 커다란 도표가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전반 벽체 지어는  천장판까지 뻗어나간 이 도표는 황대년의 2016년 일정표가 깨알같이 적혀져있었다.

서북지역에 가서 지방과학기술건설을 지도하고 발달지역에 가서 경제전환을 지도하며 성내 부분적 지역에서 지방산업전환을 조사연구하고 "천인계획"과 교육부"장강학자장려계획"을 평의심사하는 등 일정들이였다.

귀국해서 7년 동안 황대년은  3분의 1의 시간을 전부 출장에 사용했다. 황대년의 출장을 보면 독특한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은 늘 야밤시간대의 항공편을 예약했다는것이다.

낮에는 회의를 하고 상담하고 학생들을 보도하고 밤이 되여서 남들이 모두 휴식할 때면 그는 심야의 항공편을 리용하여 출장을 다녔다. 설령 비행기내에서라 할지라도 그는 PPT를 계속 수정하군 했기에 사람들은 그에게 "변명황랑"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변명황랑"은 하루 대부분을 이렇게 보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랭수로 세수하고 큰 컵으로 블랙커피 한컵을 마시고는 산더미 같은 자료속에 묻히군 하였다.

점심에 모두들 식당으로 가면 그는 컴퓨터를 주시하며 "구운 옥수수 두개"라고 웨친다.구운 옥수수가 없으면 그는 바로 가방에서 쭈글쭈글한 빵을 꺼내군 한다.

오후가 되면 사무실 문어구에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게 되는데 학교안팎의 과학연구기구와 전문가, 학자들이 그들 찾아 가르침을 청하군 한다.

한밤중이면 그는 출장다니지 않으면 연장작업을 하고 어떤 때에는 일부 전문가들과 전화로 교류를 한다.

"황선생은 경상적으로 일부 단위의 전화를 받군 하는데 일부 중대한 돌발사건과 까다로운 문제에 대한 의견을 널리 구하는것으로서 시간은 대부분 깊은 밤중이였다."

국토자원부,과학기술부,교육부,중국선박 중공업집단회사,절강대학…많은 부문과 기구에서 우리는 황대년과 익숙한 전문가들을 찾을수 있었다. 황대년연구팀의 성원들마저도 황대년이 동시에 얼마나 많은 사업을 감당하고있는지를 알기 어려웠다.

같은 팀의 "천인계획"전문가 왕헌창은 황대년을 보고 "이것은 생명을 걸고 과학연구를 하는것이다! 이렇게 계속 과학연구를 하면 강철로 만든 몸이라도 견뎌내지 못한다"며 아주 걱정하였다.

이 "변명황랑"은 위챗모멘트에 "나는 하루를 살면 하루를 버는것으로서 언제 쓰러지면 그 자리에 묻어달라…"고 올렸다.

1분이라도 쪼개여 사용하지 못하여 속태우는 "변명황랑"은 자신의 생명을 극한으로 발휘했다. 실신과 경련의 빈도가 늘어났으며 누가 건강검진을 받을것을 권고하면 그는 언제나 바쁘다는 리유로 미루어왔다.…

황대년은 늘 팽이처럼 돌아쳤다. 벽에 걸려있는 2016년 11월의 일정표에는 그의 생명중 마지막 스케줄인 북경-녕파-장춘-북경-장춘-북경-장춘-북경-장춘-북경-성도가 기록되여있었다.

11월 29일 일정표에는 "제7회 교육부 과학기술위원회 지학과 자원학부 년도사업회"가 표기되여있었다. 그후에 더는 그 어떤 기록도 없었다. 우리의 의혹에 찬 눈길을 보고 황대년 생전의 조수이며 지구탐측과학 및 기술학원의 교수인 우평은 오열하였다-

그날 새벽 2시, 북경에서 성도로 날아가는 제일 늦은 항공편이 착륙하자마자 황대년은 구급차에 실려갔다.

취재과정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같은 문제를 물었다.

저명한 과학가 시일공은 이 오랜 벗을 가장 잘 알고있었다. “과학의 경쟁속에서 취득한 그 어떤 성적도 금방 과거로 되기에 진정한 과학가는 언제나 자기가 한걸음이라도 늦어지면 뒤떨어질수 있다는 극심한 불안감을 갖게 된다.”

바로 이와 같은 “불안감”과 이와 같은 “능력공황”이 황대년이 혼신을 다해 사업하는 동력의 원천이였다.

중국과학원 지질지구물리소 부소장 양장춘은 “그의 사업 동력을 일종 사업과 꿈을 추구하는 정상상태로 리해하는것이 옳을것 같다. 그는 가장 선진적인 성과를 초월하려고 노력하였기에 그는 연장작업을 해야 했던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연구성과를 타파, 부정하고 뒤집어야만 한걸음 한걸음씩 제고하고 추월할수 있었던것이다.”

아마이것이  “변명황랑”의 내심세계였을것이다.


애국지심-“해외생활” 18년 동안 “중화진흥은 우리의 책임”이라는 초심 잊지 못해

지질궁앞의 문화광장을 걷노라면 눈앞의 이 건물이 각별히 장엄하고도 숙연하게 안겨온다.

우리는 저도 모르게 리사광을 떠올리게 되고 이 건물의 설계자 량사성을 떠올리게 되며  또 황대년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서 마음속 깊이에서 갑자기 “과학은 국경선이 없으나 과학가는 조국이 있다”는 프랑스 과학가 루이스 파스퇴르의 명언이 떠오른다.

황대년의 몸에서 우리는 이 명언의 무게를 더욱 느끼게 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국외에서 이미 성과와 명예를 떨친 황대년의 선택에 대해 리해하지 못하고있다. 그들은 만약 황대년이 살아있어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면 그가 역시 귀국을 선택할것인지를 물었다.

취재가운데서 우리는 이 문제를 부동한 취재상대들에게 물었다.

“나는 귀국을 선택했을거라 생각한다!” 황대년의 남동생 황대문은 긍정적으로 말하면서 “부친께서는 생전에 늘 대년에게 너는 조국이 있는 사람으로서 나라에 충성하는 지질인이 되여야 한다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황대년은 1958년 8월 28일에 출생했으며 그의  부모는 광서지질학교의 교원들이였다.

황대년은 즐거운 동년시절을 부모와 함께 생활하면서 지성적인 교육을 받으며 지냈다. 리사광, 전학삼, 등가선… 기억속에서 부친이 경상적으로 이야기한 이런 과학가들의 모습은 거의다 비슷했다. “수척”하고 “선량”하고 “들고온 트렁크에는 책들이 가득”하였다.

황대년의 부모는 로세대 중국 지식인의 전형적인 대표이다. 새 중국의 성장과 함께 겪어온 간고분투속에서 그들은  참고 견디고 자제하며 소박하고 너그러우며 기여만 중시하고 보상을 탐내지 않으며 시종 조국에  충성과 책임을 다했다.

황대문은 부모가 병환으로 돌아갈때 병상앞에서 효성을 다하지 못한것이 형의 마음속에 영원한 아픔으로 남아있음을 잘 알고있다.

2004년 3월, 부친이 급작스레 병세가 악화되여 림종을 맞이하고있었다. 이때 황대년은 영국ARKeX회사에서 파견한 대표의 신분으로 미국전문가와 함께 1000메터 깊이의 바다밑에서 “중력 경도 측정기”의 군용을 민용으로 전환하는 분야 기술난관을 공략하고있었다. 만약 영국지도교수가 극력 추천하지 않았다면 미국측에서는 중국과학가를 이 연구에 참여시키지 않았을것이다. 난관공략이 관건단계에 진입한 상황에서 황대년은 눈물을 삼키면서 시험연구를 마지막까지 견지했다. 그가 다시 륙지에 돌아왔을 때에는 부친의 장례를 이미 치른 뒤였다.

2년후, 미국 공군기지에서 똑같은 실험을 잠수정으로부터 비행기에 옮겨 진행할 때는 어머니의 병세가 위독할 때였다. 림종을 앞두고 로인은 바다 멀리에 있는 아들에게 전화로 외국에서 꼭 자기몸을 돌보며 사업할것을 당부했으며 빨리 돌아와 조국을 위해 기여하라고 부탁하였다.

황대년은 부모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꼭 돌아올것입니다!"하고 황대년의 대학동창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1982년 황대년은 장춘지질학원을 졸업하였다. 해마다 3호학생의 영예를 따낸 황대년은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게 되였다. 그는 졸업앨범에 "중국을 진흥시키는것은 우리 세대들의 책임이다!"는 짧고도 힘있는 말을 써놓았는데 이것을 동창생 모상남이 지금까지 보관하고있다.

1993년 초겨울, 학교에서는 황대년을 영국 리즈대학에 보내 학문을 더 닦도록 하였다. 당시 공항까지 배웅했던 동창생 림군은 그때 황대년이 손을 힘껏 저으면서 외국의 선진기술을 배워가지고 꼭 돌아올것이니 기다려달라고 큰소리로 웨쳤다고 말했다.

모교의 "간고분투를 영광으로 삼고 지질사업에 헌신하는것을 영광으로 삼으며 조국을 위해 광산을 찾는것을 영광으로 삼자"는 전업교육이 언녕 그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졌던것이다.

국토자원부 과학기술 및 국제협력사 부사장 고평은 황대년에 대해 잘 알고있다면서 영국의 우월한 환경속에서 황대년은 자신이 이미 영국의 선진기술을 탐색했으며 귀국하는것이 자기를 돌파하는것이고 조국을 위해 봉사하는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고평은 제일 먼저 황대년을 귀국하라고 동원한 사람이지만 후에는 망설이였다. 그는 대년에게 국내의 생활조건이나 사업환경이 모두 영국보다 못하니 재삼 고려해볼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황대년이 귀국하기를 바라면서도 또 그가 귀국한것을 후회할가봐 두려웠다.

당시 캠브리지 ARKeX지구물리회사 연구개발부 주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황대년은 사람마다 우러러보고 따라배우는 전기인물이다. 그는 외국원사를 포함한 300명의 "고급인력"팀을 이끌고 해양과 륙지의 복잡한 환경속에서 괘속이동방식으로 지상에 대한 관통식 정밀탐측을 실시하여 기술돌파를 실현하였다. 이 기술은 오늘날 세계 각국 과학기술경쟁 더 나아가 전략포치에서 최고수준이다. 뿐만아니라 안해는 런던에서 두개의 진료소를 경영하고있었고 딸은 영국에서 대학을 다니고있어 가정생활이 풍족하고 사업도 성공적이였다.

하지만 황대년은 처음부터 귀국할것을 다졌다. 그는 영국에서는 화초재배자일뿐이고 생활이 아무리 안락해도 손님에 지나지 않는다며 국가가 나를 부를 때 반드시 조국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결심했다.

길림대학 지구탐측과학기술학원 원장 류재는 지금도 황대년이 영국에서 그에게 부쳐보낸 회답편지를 간직하고있다. 편지에서 황대년은 "대다수 사람들이 나중에는 그래도 고향을 찾아가지만 첨단과학기술인재는 주렁진 성과를 거둘 때 조국으로 돌아가야 가치를 더욱 잘 발휘할수 있다. 지금 조국이 우리를 제일 수요할 때 우리는 경험과 기술, 생각, 추구를 갖고 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썼다.

2008년, 국가발전전략을 둘러싸고 우리 나라는 "해외 고급인재 유치계획"("천인계획"으로 략칭)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류재는 그저 시탐적으로 이 소식을 황대년에서 알려주었는데 황대년이 마치 이 시각을 줄곧 기다리기라도 한듯이 귀국을 다그칠줄은 생각밖이였다.

18년간 영국 런던에서 생활한만큼 이미 습관화된것도 많았고 아쉬움도 많았다.

그의 과학연구팀 성원들은 가지 말고 여기에 있으면 더욱 큰 성과를 얻을수 있다며 그를 재삼 만류하였다.

하지만 그는 누가 뭐라 해도 따뜻하고 드넓은 조국을 모른척 할수 없다는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친구들도 그가 무엇때문에 반백이 다 된 나이에 즐겨야 할 인생을 즐기지 않고 고생을 사서 하는지 리해할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이 외국에서 사업적으로 아무리 성공하였다 해도 조국의 강성을 대표하지 못한다며 조국에서 똑같은 사업을 하여 성공하는것만이 최대의 만족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무런 여지도 남기지 않고 제일 짧은 시간내에 사직하고 별장을 팔아버리고 귀국절차를 밟았다. 그의 안해 장연도 제일 빠른 속도로 제일 저렴한 가격으로 경영하던 진료소를 처리했다.

진료소를 팔고 후속처리를 마친 그날, 장연은 버릴수밖에 없는 여기저기 널려있는 중약과 의료기재들 가운데 앉아 대성통곡하였다…

18년의 캠브리지생활을 이렇게 미련없이 버리고 떠났다.

황대년은 조국으로 돌아왔고 동북지역에서 유치한 첫 "천인계획" 전문가로 되였다.

고평은 황대년에 대해 너무나도 잘알고있다. 그는 "천인계획"이 황대년을 귀국하게 하였고 서슴없이 온심혈을 다 기울여 리상포부를 실현하게 하고 애국열정을 토로하게 하였으며 귀국이 그로 하여금 사업과 정감을 하나로 융합하도록 하였다고 말했다. 
귀국 후의 이 7년은 그의 인생이 고속운행한 7년이고 그가 대오를 이끌고 “위성”을 높이 쏘아올린 7년이며 그가 병마에 조금씩 그를 침식당한 7년이다......

황대년의 유물을 정리하던 왕욱함은 그의 거실 침대 머릿장의 세번째 서랍이 알록달록한 간질환 약들로 가득 차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황선생님이 이 약들에 의지해 얼마나 많은 깊은 밤들을 날밝을 무렵까지 지샜는지 알 수가 없다.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할 때마다, 밖에서 분망히 돌아치느라 사랑하는 아내가 외로이 혼자 집을 지키고 딸의 결혼식이 그의 분망함으로 인하여 번마다 미뤄질 때마다, 깊은 밤마다 병마에 시달려 엎치락뒤치락할 때마다......

황대년, 당신은 진짜 후회하지 않는가?

“당시의 선택을 다시 회상해 보아도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기자는 황대년이 모교에 남긴 한편의 사업 자술서에서 그의 대답을 찾을 수 있었다.

“부모님 세대들의 조국에 대한 신념이 내가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인재가 되도록 동행하였고 내 인생에 있어서 거의 모든 선택을 좌우지했다: 바로 조국이 그 무엇보다도 높은 것이다!”

적자지심ㅡㅡ초탈의 태도로 학문을 연구하고 연구를 하며 사회와 호흡을 같이 하는 태도로 나라를 사랑하고 과학을 사랑했다.

한겨울부터 초봄에 걸쳐 진행된 취재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속의 황대년을 묘사했다.

황대년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희미하던데로부터 뚜렷하게 안겨왔고 낯설던데로부터 익숙하게 되였으며 “다가서기 힘든”데로부터 피와 살이 있고 숨쉬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주광잠선생은“초탈의 태도로 처신하고 사회와 호흡을 같이 하는 태도로 사업하는것”이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이야기 한적이 있다.

황대년이 바로 이러한 사람이다 ㅡㅡ초탈의 태도로 학문을 연구하고 연구를 하며 세속적인 것에 구애받지 않고 초연했고 사회와 호흡을 같이 하는 태도로 나라를 사랑하고 과학을 사랑하며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는 순수한 사람이였다.

귀국한 이 몇해 동안에 황대년은 과학연구령역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고평의 말을 인용하면 “대년은 과학을 ‘제멋대로”한다. 그는 상급을 일방적으로 따르지 않았고 권력을 일방적으로 따르지 않았으며 관계를 일방적으로 따르지 않았고 절때로 “너 좋고 나 좋으면 우리 모두 좋다”는 관점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마치 한갈래의 맑게 흐르는 물과 같았다.

“심부탐측기술및실험연구”대상은 관련된 경비가 10여억원이고 력사이래 중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심부탐측대상이다. 황대년은 귀국후 얼마안되여 해당 대상의 제9 분조 수석전문가를 맡았다.

이토록 방대한 대상에서 어떻게 과학연구력량을 효과적으로 조직하고 대상으로 하여금 통일된 목표하에 성과를 취득하도록 하는가는 매우 큰 시험이였다.

황대년은 선뜻 나서서 ‘회사화”, “성과화”관리리념을 제출했고 “유럽의 큰 회사의 관리경험을 본받아 총적목표하에 관련 책임자에게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하고 층층이 시달을 틀어쥐었으며 책임을 시달했다.”

“우리는 과학자이지 공정사가 아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반대했다.

어떤 사람은 그를 “세상을 등지고 틀어박혀 사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대상을 가동할때 먼저 계획을 작성하는데 어떤 전문가는 맡은 과학연구임무가 비교적 많아 전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는 명성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일률로 통보했다. “만약 출근도장만 찍고 이름만 걸어 놓을거면 오지도 말라.” 론증회를 소집하면 그 누가 현장에 있거나를 막론하고 그는 절때로 상투적인 인사말을 늘여놓은적이 없으며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했다.

그가 맡은 대상은 투자금이 약 3억원에 달하는데 많은 기구와 단위에서 리익을 챙기려 했다. 그는 소개자료를 보지 않고 미리 통지하지 않으면서 직접 상대방의 실험실과 작업장에 들이닥쳐 상대방의 자질수준을 검사했다. 제딴에는 그와의 관계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전문가가 찾아와 모 연구기구를 도와 “경비를 조금 쟁취”하려 했다. 그는 “나는 맞수도 없고 친구도 없다. 오직 국가리익만 있을뿐”이라는 한마디로 상대방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후에 상대방은 “길림대학이라 해도 한푼 더 가져가지 못했다는것”을 발견했다.

어떤 사람은 그를 “털을 불어 헤쳐가며 결점을 찾는다”고 말했다.

“첨단적인 기술은 선진적인 설비가 안받침돼야 한다”고 믿은 그는 설비를 구입할때 여러 물건을 비교한후 조사연구보고를 제출할것을 요구했다. 그는 “기술지표는 애매모호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면서 한개라도 정확히 설명을 못하면 싸인을 해주지 않았다. 그는 PPT발표가 “흠잡을데가 없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최후의 기한까지 한번한번 수정 보완하고 문장부호까지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일부분 사람들이 더욱 받아들이기 힘든것은 그가 국외로부터 온라인관리시스템을 도입하여 기술임무를 매달, 매주, 지어 매일까지 분해한것이다. 매일 저녁 11시면 그는 꼭꼭 등록하여 검사했는데 시스템을 통해 누가 게으름을 부리고 누가 뒤쳐진것을 샅샅이 볼수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우는 소리를 했다. “우리는 과학자이지 로보트가 아닙니다!” 그러나 황대년에게 있어서 이 시스템은 수면제와도 같아 먹으면 잠을 잘 잘수 있었다. 또한 이 시스템은 흥분제와도 같아 한번 열고 들어가면 문제명세서를 작성하고야 말았는데 그러자면 또 하루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의 “성질”을 맛본 사람도 있다.

2010년 봄의 하루 아침이였다.

“어찌된 일이오? 왕동무, 재촉했소?” 황대년이 조금 초조해 하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재촉했습니다. 황선생님!” 왕욱함은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힐긋 보았다. 9시 50분, 회의 시작까지 10분 남았는데 자료를 다 받지 못했고 사람도 다 오지 않았다.

대상진척배치에 따르면 과제조장은 매달마다 영상답변을 해야 한다. 그러기 전에 각항 준비를 앞당겨 하고 과제조가 바친 회보자료를 미리 보는것이 황대년의 습관이였다.

“사람이 많아도 쓸모가 없군!” 손을 휘두루더니 들고있던 휴대폰을 땅에 내리쳤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얼어붙었다. 황선생이 이렇게 큰 화를 내는것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납세자의 돈을 그렇게 많이 받고서도 일을 대충해도 됩니까? 회보자료를 잘 작성하지 않는가 하면 회의를 열어도 제때에 도착하지 않다니? 우리가 계약정신을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킵니까!”황대년이 상을 내리쳤다.

사후에 그는 미안한 마음으로 “저는 매우 급합니다. 저는 누군가가 연구진척을 함부로 늦추는것을 참을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일하다가는 중국이 뒤쳐질가봐 걱정스럽습니다!”라고 말했다.

초탈의 정신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마음가짐이 황대년의 순수한 인생을 결정했다.

황대년은 세상과 등지고 사는 사람이 아니고 결점을 찾아내기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였다.

학생들의 마음속에 새겨져있는 황대년은 “군림하는 학술권위”라기보다는 되려 “엄격한 스승, 자상한 부친과 같은 선배”이고 “흉금을 털어놓을수 있는 친구”였다.

접때 가르친 마국경과 리려려는 집이 농촌에 있었다. 황대년은 그들의 전업잠재력을 보아내고 각종 기회를 마련하여 그들이 영어를 학습하게 하고 국제교류에 참가하도록 배려했다. 둘이 연애를 하자 그는 둘이 학교에 남도록 쟁취했고 졸업하여 결혼하게 되자 또 그들을 도와 임대주택을 찾아줬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너무 사사건건 관계한다고 나무랐지만 그는 “우리 나라의 인재에 대한 수요는 너무나도 시급합니다. 지금 많이 관심하면 그들 가운데서 대가가 나오고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수 있습니다.”고 말했다.

학교지도자가 몇차례나 그더러 빨리 원사를 신청하라고 재촉했지만 그는 “먼저 일을 잘 해내야 합니다. 명성이 중요하지 않습니다.”고 말했다. 지구탐측과학및기술학원 원 당위서기인 황충민은 다음과 같은 사연을 들려주었다. 학술회의나 강좌에 참가할때마다 대년은 단번에 10여페이지가 되는 자료를 준비해내군 했지만 그더러 수상자료를 작성해라면 반페지도 채우지 못했다.

정신이 맑게 깨여있던 마지막 나날에도 그는 침대에 기대여 점적주사를 맞으며 학생들의 의문에 대답해 주었다. 그는 우평에게 “우리의 경비를 더 압축하고 기타 기구의 적극 참여를 보장하십시오”라고 당부했다. 그는 부교수 평의에 참가한 팀의 요영명의 일을 괘념하여 연필도 겨우 잡은 손으로 한단락의 추천어를 비뚤비뚤하게 써내려갔다.

“사람의 생명은 력사의 긴 과정에 비할때 한순간에 불과하다.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하다가는 평생을 헛되이 살게 된다. 만약 하나의 자그마한 물보라가 되여 헌신자의 도도한 홍류에 가입하고 력사의 발전을 추동할수 있다면 나는 이것이야말로 일생에서 가장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이것은 그가 입당지원서에 적은 맹세이다.

그리고 그는 실천해냈다!

에필로그: 안녕히란 말은 하지 말자

2017년 1월 1일, 신년 원단 수술이 지난지 18번째 되는날. 병실에 누워있는 황대년의 팔에는 점적주사 바늘로 가득했다. 길림대학 지구탐측과학및기술학원 부교수인 초건의 도움하에 황대년은 습근평총서기의 신년축사를 듣고있었다.2016년,“중국천안(中国天眼)”이 가동되고 “오공(悟空)”호가 궤도에서 1년간 운행되고있으며 “묵자호(墨子号)”가 태공으로 솟아올랐고 신주 11호와 천궁 2호가 은하수를 날고있으며... 연설에서 습근평주석이 과학기술 공략에 대해 언급하는것을 듣고 황대년은 매우 격동했다. 그는 깊은 호흡을 들이쉬면서 쉰 목소리로 초건에게 말했다. “국가가 과학기술 혁신을 이렇게 중시하니... 나라적으로 결심이 있는만큼... 우리의 기술이 금방 유용하게 되겠네... 준비들 잘하고 화이팅 하게...”말을 마치자 한동안 격렬한 기침이 나왔다.

초건은 솟구쳐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병실을 나섰다. 문을 나선 그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님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보았던것이다.그가 료해하고있는 황선생님은 선두를 달려야 한다는, 극한을 초월해야 한다는 생각을 단 한 시각도 멈춘 적이 없는 사람이였다.

하지만 그가 어찌 알았으랴 이것이 황선생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에게 준 마지막 가르침인줄을.

1월 2일, 황대년의 온 몸에 열이 나기 시작했다.

1월 3일, 고열이 내리지 않았고 기침까지 동반했다.

1월 4일 저녁, 나쁜 소식이 끊기지 않았다. 황대년의 내장에서 대량의 출혈이 일어났고트랜스아미나제(转氨酶)수치가 높아졌으며 간기능이 쇠퇴하는 경향이 보였고....

이때 머나먼 영국에서 황대년의 딸 황소도 분만의 고통속에서 몸부림 치고있었다.

아픔이 지나가고 응아응아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황대년의 외손자가 이 세상에 태여났다. 황소는 허약한 몸으로 아들을 어루만지고있었으나 마음은 칼로 에이는듯 아파났다. 눈물이 멈출줄 몰르고 흘러내렸다. 머리속에는 결혼식때 자기와 함께 춤을 추면서 자애로운 눈길로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맴돌아치고있었다. 그가 어찌 생각이나 했으리 그것이 아버지와 춘 마지막 춤이였다는것을.

“춘런의 사진을 찍어 고모한테 빨리 보내세요.”황소가 영어로 남편에게 얘기했다.

춘런은 황대년이 지은 왼손자의 중국이름이다. 장춘이라는 춘에 런던이라는 런. 일찍 황대년이 말했다. 그의 일생에서 이 두 도시는 가장 잊을수 없고 가장 좋아하는 도시라고.

“오빠, 오빠 빨리 정신차리세요, 소소가 낳은 남자아이예요...” 녀동생 황령이 손에 핸드폰을 들고 중환자실에 뛰여들어와  황대년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속에 갓난 아기는 피부가 노랗고 머리가 검으며 얼굴이 동그랬는데 용모가 황대년의 모습을 너무나 닮아있었다.

“오빠...오빠... 보세요. 춘런이 오빠랑 얼마나 닮았는지, 좀 보세요!”

그 시각 황대년은 이미 의식을 잃어가고있었다.

1월 8일 오후 1시38분, 정오의 해빛이 중증환자실의 창살을 비치고있는가운데 황대년은 고이 잠들어있었다.

안녕히라고 말하지 말자, 황대년은 떠나지 않았다. 학생들의 귓가에는 황대년의 익숙한 목소리가 맴돌아치고있었다.

“원대한 리상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지니고 외국에 나갈수 있을뿐더러 돌아올수 있는 과학자가 되여야 한다.”

안녕히라고 말하지 말자. 황대년은 떠나지 않았다. 그가 사랑했던 이 곳의 매 모퉁이마다 그의 익숙한 모습이 고스란이 남아있었다.

지질궁, 507실.

우평, 왕울함은 경상적으로 황대년의 사무실에 조용히 앉아있군 한다,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선생님을 기다리듯이.

사무실과 핸드폰의 벨소리가 아무때고 그들의 평온을 깨뜨린다. 한번 또 한번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그들은 어김없이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는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대방에게 알린다...

신화사 기자 오정 진총 주립권 장건

(신화사 장춘 5월 17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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