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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의미 있는 장충단공원

2018년07월02일 09:02
출처: 연변일보   조회수:21

한국 서울의 장충단공원은 규모가 작지만 력사적 의미를 가진 문물이 많이 있다고 했다.

서울 지하철 3호선을 타고 동대문역에서 내려 6호 출구로 나가면 곧장 장충단공원에 이르게 된다.

소문 대로 자그마한 규모의 공원, 공원입구를 거쳐 들어가면 처음으로 눈에 안겨오는 것은 장충단비다. 화강암으로 된 이 비석은 높이 2메터인데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때가 끼여 글씨가 잘 알리지 않았다. 비 옆에는 소개판이 있어 장충단비와 이 공원의 유래를 알 수 있었다.

장충단비는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1호였다. 이 비는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 시해 직후 일본인들과 싸우다 희생된 많은 장병들의 충혼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것이다.

장충단비석의 비문은 조선국 말대황제 순종이 황태자일 때 쓴 글이고 뒤면의 글은 충정공 민영환이 쓴 것이라 한다.

1908년, 장충단은 일제로 하여 페사되고 1920년 후반부터는 이 일대를 장충단공원으로 부르게 하여 벚꽃나무를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하였으며 일본군이 중국 상해를 침범할 때 전사한 일본군을 용사라 하여 동상과 이또히로부미의 보리사인 박문사를 세웠다. 조선 해방 이후 일본군 육탄용사 동상과 박문사는 허물어버렸다.

장충단공원 언덕에는 사명당(사신이 되여 왜국에 건너가 막부의 수장인 도쿠가와와 교섭해서 사로잡혀간 남녀 3000여명과 로략질해간 많은 보물을 도로 찾아온 인물) 동상이 있다.

사명당의 동상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한국 유림독립운동 빠리 장서비가 있다. 이 비는 1973년에 세워졌는데 1919년 프랑스 빠리에서 세계평화회의가 열리자 곽종석, 김복환 등 조선 유림의 대표자 137인은 조선독립을 청원하는 긴 편지를 이 회의에 제출한다. 유림들은 나라를 위하여 적과의 싸움보다 청원서를 올려 국제 세계평화인들의 동정을 받아 침략자 일본을 몰아내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원했던 것이다. 그런 발상은 아둔한 것이였다. 빠리 장서 청원서는 기각당하고 청원서의 주요인물인 곽종서는 일본 경찰에 의해 투옥되고 2년간 감옥생활을 하고 출옥하자 타계했다.

장충단공원에는 수표교란 다리가 있는데 세종 1422 년에 세웠다. 수표교란 물이 붓고 줄어듦을 측정하는 다리이지만 예전에는 이 다리 근방에 소나 말을 파는 가축시장이 있었기에 마전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장충단공원에는 1964년에 축조한 리준 렬사의 동상도 있었다. 리준 렬사는 조선왕 고종을 만나 을사조약이(1905) 강압적으로 체결된 것이니 세계 각국에 이 사실을 알리자는 건의를 제출하여 왕의 허락을 받고 1907년에 로씨야를 걸쳐 헤이그에서 열리는 세계평화 회의장에 도착해 회의에 참석하려 노력하였지만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무산되였고 세계 렬강들은 랭담하였다. 이에 격분한 리준 렬사는 헤이그에서 자결했다. 그의 유체는 헤이그에 있다가 1968년에야 서울로 옮겨다 안장했다.

나는 장충단공원을 돌아보고 나서 조선의 독립은 오로지 무장투쟁으로 일본침략자를 몰아내는 길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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