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뉴스 > 겨레 > 연변가요 “돌다리”의 보컬 현성해, 제2의 고향 일본에서 더 큰 “꿈”을 펼쳐

연변뉴스 APP 다운로드

연변가요 “돌다리”의 보컬 현성해, 제2의 고향 일본에서 더 큰 “꿈”을 펼쳐

2019년03월01일 09:27
출처: 중국조선어방송넷   조회수:1090

▲박연/현성해 2인창이 부른 <돌다리>

현성해 (玄星海), 그는 한때 연변대학 예술학원 강신자 교수의 애제자로 남도민요와 판소리를 전공하면서 크고작은 무대에 올라 관중들의 사랑을 한몸에 안았던 애송이 민악 소녀였다. 당시 동기들로는 최려나, 박연, 김선희, 김해연 등이 있었는데 최려나, 박연과 함께 세명이 같이 하는 무대가 많았다. “돌다리” 외에도 “친구의 노래”, “샘물골처녀”, “즐거운 아리랑” 등 민요작품들이 있다.

20여년전으로 돌아가 당시 그들의 화려한 무대를 떠올려본다.

▲ 연변예술학교 “3총사” 최려나/현성해/박연


그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고운 목소리로 동네에서 <꼬마가수>로 불리웠다. 소학교3학년 때 연길시 소년궁 음악선생님(김해월)으로부터 꼭 한번 키워보고 싶다는 제안을 받아 전문적인 음악공부를 하게 되였다. 수많은 학습과 련습을 통해 그는 드디여 화려한 무대에 서게 되고 <음력설야회>, <매주일가>, <주말극장> 등 연변텔레비죤 프로그램과 잡지, 광고, 라지오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민요가수의 꿈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씩 알차게 걸어갔다. 그대로만 나갔다면 그의 앞날은 탄탄대로였을지도 모른다.

▲ 당시 동기였던 현성해(좌), 최려나(중), 박연(우)

학업과 음악공부를 병행하면서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어느 날, 그는 불현듯 더 큰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맞춰진 인생퍼즐이 아닌 부풀어오른 청춘의 열정으로 용기있는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고집스럽기로 아홉마리 소로도 끌어오지 못하는 딸의 완강한 결단에, 결국 부모님들은 곱게 키운 딸을 낯선 이국땅에 보내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일본류학의 길, 그곳에서 그의 제2인생이 펼쳐진다. 20년 가까운 지난 세월동안 일본에서 어떤 인생궤적을 걸어왔고 애송이 민요 소녀의 꿈은 어디로 갔는지? 세월을 거슬러 18년전인 2001년으로 돌아가 본다...

현성해씨가 직접 투고한 인생수기를 그대로 옮긴다.


      청춘의 열정으로 택한 일본행

2001년 4월, 수많은 환상과 기대를 한몸에 지닌채 일본 땅을 밟았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만만치가 않았다. 우선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 곧바로 일자리를 찾아야만 했으나 일본어가 많이 서툴렀던 나에게 있어 이는 너무 어려운 일이였다. 그러다 보니 궂은 일 마른 일을 가릴 상황이 못되였다. 일할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닥치는대로 일했었다. 택배회사에서 무거운 짐을 나르면서 한달에 체중이 3킬로그람씩 빠지기도 했고, 야키니쿠 가게에서는 매일 주방 안에서 땀으로 샤와를 할 정도로 무거운 솥가마를 닦기도 했었다. 너무나 고달프고 힘들어서 남몰래 눈물도 참 많이 흘렸었다.

화려하고 편안했던 고향에서의 생활과는 달리 일본에서 나는 그야말로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일명 가난한 류학생에 불과했다. 가끔은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마다 포기라는 단어가 자꾸 떠올랐지만 여직껏 나의 뒤바라지를 위해 묵묵히 헌신해준 부모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차마 이대로 주저앉을수는 없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고향에선 손에 물 한방울 묻혀보지 못했건만...

      노력과 인내의 시간은 쓰거웠지만...

그 결실은 달콤했다. 어느덧 나의 일본어 실력은 놀라울 정도로 제고되였고 하고 싶은 일도 척척 해나갈수 있게 되였다.

한번은 일본 수제버거 체인점인 <모스버거>라는 곳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는데 당시 가게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었다. 하는 일도 적성에 맞았고 또 그 곳에서 좋은 친구들도 사귀며 즐거운 나날을 보낼수가 있었다. 햇내기 아르바이트생으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는 나의 근면과 성실함이 인정을 받아 아르바이트 매니저로까지 승진해 신참들을 가르치고 점장의 오른 팔 역할을 하면서 3년 이상 지내게 되였다.

하는 일도 재밋고 낯선 일본땅에서의 류학생활도 적응을 잘해 나갔지만...맘속의 이름모를 공허감은?

마음 한구석에는 늘 이름모를 공허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맘속의 이름모를 그 ’공허감’이 바로 내가 잠시 내려놓아야 했던<음악>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한 기회에 친구 따라 세계류학생 모임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그 곳에서 흘러나오는 우리말로 된 노래들은 내 맘을 살폿이 어루만져주었다. 그 동안의 간절함이 폭발한듯 나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내렸다. 노래를 부르면서 행복했던 모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오랜 시간동안 그 행복을 느끼지 못했으니 내 마음의 간절함은 그야말로 목마른 사슴 같았다. 그 뒤로 나는 매주마다 각 나라류학생들과 교민 3천명씩 모이는 그 모임에 참석해 다시 노래를 부르기시작했다. 특별한 행사나 라이브 콘서트가 있을 때면 한국의 유명가수들과 나란히 무대에 올라 우리민요를 부르기도 하면서 점차 일본생활에도 적응해가기 시작하였다.

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일본 명문대학인 와세다 대학의 한 연구실 비서로 취직을 했다. 하지만 사무직보다는 한사람 한사람 눈을 맞추며 미소를 주고 받는 서비스업이 더 매력있게 느껴졌다. 하여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저없이 사직서를 내고 도꾜 긴자의 유명한 백화점에 다시 서류를 넣었다. 그렇게 외국인이란 나 하나뿐인 큰 기업에 무난하게 입사할수 있었고 그 곳에서 서비스업에 관한 기본자세와 태도부터 시작해 철저한 훈련을 받게 되였다. 워낙 일본 현지인 외에도 각국 려행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나는 매장 업무 외에도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 영어로통역을 하기도 하면서 정말 “꼭 필요한 인재”로 활약하게 되였다.

      사랑이 맺어준 아름다운 인연

그 후 나는 행운스럽게도 인성과 재능을 모두 겸비한 한 남자를 만나 결혼에 골인하게 되였다. 첫 아이를 임신하면서 그 동안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려왔던 내 자신에게도 쉼을 주고저 일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기로 했다. 인차 둘째까지 태여나면서 나는 자신의 모든 시간을 오로지 가족을 위해 받쳤다. 남편은 사업상 국내 뿐만아니라 해외출장도 많아 길게는 석달 정도씩 집을 비워야 했었기에 육아는 오로지 나의 몫이였다.더 이상 노래를 부르는 현성해가 아닌 안해로, 엄마로, 그리고 주부로 밖에 살수 없었던 나는 그야말로 일인 다역으로 충실하면서도 드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 우리 사랑의 결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만큼 사랑해

      안해로 엄마로, 이젠 멋진 사장으로 변신

2016년 5월5일, 나는 남편과 함께 사이타마 현에 자체브랜드 ‘KOTOBUKI’(코토부키)를 설립하였고 푸딩과 빵 전문점을 경영하게 되였다. 개업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섬세한 장인의 기술과 최고급 원재료만 고집해 만든 상품들은 까다로운 손님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어인지 입소문을 타고 인츰 린근지역에서 유명한 가게가 되였으며, 주말에는 주차장이 부족할 정도로 많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그러나 손님이 많으면 많아 질수록 4,5명 직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체력은 바닥을 치게 되였다. 정말 바쁜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하루 로동시간이 저그만치 20시간에 달할 때도 많았다. 가게에 있어야 하는 시간이 길다 보니 가정의 일상적인 생활은 엉망이 되였고, 이대로 가다간 정말 과로사로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였다. 많고 많은 고민과 상론을 거쳐, 2년 반동안 해왔던 빵 전문점을 과감히 접고 2018년 12월 1일 푸딩과 시퐁 케익과 롤케익 전문점으로 리뉴얼 오픈을 하게 되였다.

업종 변경의 리뉴얼 오픈이란, 어찌보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사업이라는 것에 많이 불안되기도 했지만 <진짜는 진짜를 알아본다>는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원재료 중 무려 1킬로그람에 12.3만엔씩 하는, 세계적으로도 희소가치가 높은 “천연 바닐라 빈즈”에 특허한 상품만을 고집하여 만드는 우리의 상품들은 차원이 다른 향과 맛과 전문성과 고급스러운 패키지로 말미암아 거기에 걸맛는 고차원 고객들의 발길을 끌었다. 매일마다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신규 고객들과 한두명씩 늘어나고 있는 리필 고객들을 보면서, 아직 시작은 미약할지라도 나중에는 창대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도 긍정적인 마인드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항상 밝게 웃는 두사람, 너무 잘 어울려요

이뿐만이 아니다. 현상황에 만족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며 날로 성장해 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눠주며 내가 받은 사랑을 사회에 환원하는 의미있는 존재로 키워나가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최근 만들어진 것이 조선족 어린이와 그 부모를 상대로 한 서양과자 만들기 체험교실이다.

일본인을 상대로 몇차례 체험을 해본 결과, 기대이상의 뜨거운 반응을 보였고 행복해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조선족 아이들에게도 이런 행복한 웃음을 안겨주고 싶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되였다. 일본에 있는 우리 조선족 아이들이 학교수업이나 학원 외에도 이런 제과체험 같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지금부터 꾸게될 그들의 싱그러운 꿈들이 더 다양한 면으로 무지개같이 펼쳐지길 바라며 그런 멋진 꿈에 우리“KOTOBUKI”(코토부키)가 귀하게 씌여지길 바랄 뿐이다.

▲ 과자 만들기 체험교실, 너무 재밋었요.

      나 자신에게도 새 꿈이 생겼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는 고향이 그리워지고 옛 친구들이 많이 그리워졌다. 더우기 언젠가 한번은 꼭 고향무대에서 다시 노래를 부를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늘 지녔었다. 그러던 2018년 5월에 연변TV<노래자랑>프로에서 일본편을 찍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였고 나는 용기를 내서 참여하기로 맘먹었다.

그 어느때보다도 열심히 준비를 했고 또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무대에서 내려올 때는 그동안 간절히 바랐던 고향무대에 설수 있음에 감개무량하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공연이 끝난뒤, 일부러 대기실까지 찾아주신 분들도 있었다. 사진촬영을요청하는 분, 소녀처럼 퐁퐁 뛰면서 반가워하는 분, 심지어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그리웠다고 두손을 꼭 잡아주시는 분... 십여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때를 기억해주시는 고향분들을 보며 내 마음도 더없이 훈훈해졌다. 그러면서도 우리노래의 끈을 놓지 않은 자신이 처음으로대견하게 느껴졌다.

▲ 다시 무대에 올라 잠깐 접어두었던 “꿈” 펼쳤어요.

그때의 무대를 계기로 나는 처음으로 일본 조선족사회에 발을 내디디게되였고 점차 일본조선족 여러단체들의 각종 행사에 요청을 받게 되였다.그러면서 나에게 새로운 꿈이 생겼다. 앞으로 일본땅에서도 우리 노래, 우리 민요들을 마음껏 불러 향수(乡愁)에 젖어있는 수많은 우리 민족에게힐링을 전해주고 싶고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의 아이들과 어른들에게도 우리 노래와 민요를 보급하여 전통을 이어가게끔 하고 싶어졌다.

      넓은 바다의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리라

성해(星海)라는 이름은 아버지께서 넓은 바다의 별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이 되라는 바람에서 지어주신거다. 마지막 남은 인생도 푸른 바다의 별처럼 다른 사람들을 비춰주는 반짝이는 별이 되고 싶다. 내 나이도 이제 불혹에 접어들고 있지만 아직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참 많다. 꿈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 것 같다. 그 꿈들을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이고 너무나 행복하다. 그 꿈들을 이루기위하여 오늘도 나는 내가 있는 이 곳, 일본땅에서 열심히 충실히 이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본 작품에 사용된 사진 등의 내용에 저작권이 관련되여 있으면 전화해 주세요. 확인 후 인차 삭제하겠습니다. 0433—8157603.]
연변라지오TV방송국 공식위챗( ybtv-1 / 延边广播电视台 ) / 연변뉴스 APP 다운로드

[편집:pcl]
태그: 两微 

登录天池云账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