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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기억속의 연변] 1953년 모주석과 악수한 조선족 무용가 조득현

2019년10월10일 10:27
출처: 연변라지오TV넷 연변뉴스APP   조회수:359

기자가 오래된 이 사진을 찾았을 때 사진설명에 "1957년 4월, 연변가무단 부단장 조득현이 전국 문학예술사업일군대표대회(全国文代会) 참석 기간 모주석의 접견을 받았다"라고 씌여져 있었다. 우리는 기쁜 나머지 즉시 사진에 담겨진 뒤이야기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누가 찍은 사진인 지 알 수 없었고 사진 속 인물과도 련락이 닿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리는 사진설명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개혁개방전 전국 문학예술사업일군대표대회는 각각 1949년 7월과 1953년 9월, 1960년 7월에 세차례 열렸는데 1957년 4월에는 문학예술사업일군대표대회가 열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였다.

그 기간 북경에서 유일하게 열린 문화행사는 전국 민간음악 무용경연 뿐이였고 조득현이 그 공연에 참가해 안무 우수상을 받은 것이 사실이기에 우리는 이 사진이 1957년에 찍은 것이라고 잠정 판단했다. 문제는 사진속 인물 중 유화 "개국대전"을 창작한 동희문이 음악무용계 인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득현이 전국 문학예술사업일군대표대회에 참가했다는 사실로부터 이 사진은 1953년 9월 제2차 전국 문학예술사업일군대표대회기간에 촬영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진 속 모주석은 위글족 모자를 쓰고 있는데 그가 위글족 대표 접견을 마친 후 련이어 조선족 대표를 접견한 것을 보아낼 수 있으며 이는 또한 해방초기 모주석이 자주 소수민족 대표와 선물교환을 하던 시대특징과도 부합되였다.

사진에서 왼쪽 두번째, 밝게 웃는 사람이 바로 조득현이다. 조선평양에서 태여나 어릴 때부터 춤에 매료되였던 그는 20세기 30년대 중국으로 건너와 할빈에서 발레를 배웠다. 1941년 할빈 교향악단 발레단에 입단해 무용수로 이름을 날렸고 1947년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조선의용군 제3지대에 참가해 선전대의 무용지도를 맡았다. 같은 해, 동북민주련합군 정치부는 중국인민해방군의 첫 전업무용대를 조직하고 당시 조득현을 초빙해 조선무용을 전수, 지도하도록 했는데 무용으로 전투영웅과 로력모범을 찬미했다.

1949년, 조득현은 부대문공단을 따라 연변문공단(후에 연변가무단으로 개명)으로 옮겨 부단장직을 맡았다. 그후 연변예술학교를 설립하고 부교장직을 맡았다. 연변예술학교가 바로 오늘날 연변대학예술학원과 미술학원의 전신이다. 조득현은 중국조선족 무용예술의 정초자이자 개척자로 일찍 중국문련 전국위원, 중국무용가협회 상무리사, 고문, 길림성무용협회 주석, 연변문련 부주석, 중국무용가협회 연변분회 주석 등을 력임했으며 제2기 전국인대 대표, 제5기, 제6기 전국정협 상무위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1953년 9월 23일 소집된 제2차 전국 문학예술사업일군대표대회에서 주은래 총리는 "전형적인 인물을 부각해 사회 전진을 추동하자"는 요구를 제기하고 문화예술사업일군들이 "혁명의 현실주의와 혁명의 리상주의를 결합하여 사회주의 현실주의가 되게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바로 그 대회에서 로동자, 농민, 군인들속에 심입해 우수한 인물을 발굴해 전형을 부각하고 대중에게 감동을 주는 창작방침을  확정했다.

당의 호소는 조득현의 예술적 추구와 같았다. 연변가무단의 안무 겸 무용교원을 맡은 조득현은 민간문예를 중시하고 끊임없이 무대예술 내용을 풍부히 했다. 1951년, 조득현은 시골민요 수집과정에서 농악무라는 즐겁고 성수나는 민간오락 무용형식을 발견했다. 그는 기예가 뛰여난 민간 예술인 하태일을 가무단으로 초빙했고 자신도 따라서 춤을 추며 자세히 기록한 결과 4개월 뒤, 마침내 무대표현에 적합한 농악무를 창작해 민간오락무용을 성공적으로 무대예술로 개조했다.

개조된 농악무는 민간오락 무용 중의 큰 북, 작은 북, 둥근 북과 상모 등을 통합하여 무용수단으로 전환하였고 조선족 전통의 장단음악 절주 특성을 살려 춤 동작을  편성해 자유분방하고 흥겨우며 랑만적인 민족정서를 구현했다. 조득현은 원래 남자들만 무용에 참가하던 옛 풍습을 버리고 녀배우들을 무용에 참여시켜 아름다움과 강인함을 대칭시켜 농악무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1951년 8월 13일, 전주 문예회공연에서 연변가무단이 처음으로 무대에 선보인 “농악무”는 관객들의 뜨거운 환영과 지도자의 칭찬을 받았다. 1952년 10월 23일, 연변가무단이 전성 문예회보공연에서 선보인 무용극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의 상모춤은 현장의 초점으로 떠올랐고 하태일은 공연 1등상, 조득현은 창작 1등상을 받았다.

1953년 7월, 심양시에서 열린 “동북삼성 제1기 연극, 음악, 무용 견학 회보공연”에서 하태일이 상모춤 공연 우수상, 조득현이 안무 1등상을 받았다. 1957년 3월 10일~3월 22일 문화부,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등 단위에서 주최한 전국 민간음악무용회보공연(全国民间音乐舞蹈会演)이 수도 북경에서 열렸는데 전국 27개 대표단, 20여개 민족의 1300여명 민간예술인들이 공연에 참가했다. 연변가무단의 농악무는 강렬한 반응을 일으켰고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하태일이 무용 우수상, 조득현이 안무 우수상을 받았다.

“농악무”의 성공은 전국 문학예술사업일군대표대회가 확정한 “사회주의 현실주의”의 창작 방침의 성공이다. 민간에서 발굴하고 무대에서 번영시킨 안무 기교는“조득현식 창작방법”이라 불렀다. 당시 조득현의 인솔하에 연변의 무용예술가들은 민간에 심입해 대량의 민족무용을 발굴하고 정리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는“부채춤”, “장고춤”,“삿갓춤” , “물동이춤”, “지게춤” 등은 모두 “조득현식 창작방법”의 산물이다.

2009년 9월 30일, 유엔 교육 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는 중국 조선족농악무(상모춤)를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했다. 이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 유일한 무용종목이다. 중국 조선족농악무의 문화적 가치는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출처: 연변조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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