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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기억속의 연변] 1965년 당원가족 17가구, 방천에 이주

2019년10월22일 11:15
출처: 연변라지오TV넷 연변뉴스APP   조회수:1

방천촌은 중조로 세개 나라 접경지대에 위치해있고 중국 “동방제1촌”으로 불리운다. 하지만 이 촌에는 예전에 촌민이 살지 않았다.

새중국이 성립된 후 경신공사 군중들이 방천에 와 농사를 지었다. 1957년 두만강 물이 범람하면서 도로를 훼손했고 방천 국토와 륙지 교통이 단절되면서 20평방 킬로메터에 달하는 방천은 “고립된 섬”으로 되였다.

17명 당원 방천에 정착하다

1963년 강태원 가족이 경신공사 소반령촌에서 금당대대로 이주했다. 그는 공사 량식관리소에서 사업하며 금당대대 당지부 부서기를 겸임했다. 그 해 11월, 사회교육사업대(社交团)가 훈춘에 진입했다. 당시 연변군분구 부정치위원인 조남기가 경신공사 사회교육사업대에서 당위서기 겸 단장을 맡았다. 이 기간 조남기는 방천에 대해 료해를 깊이하며 이 “고립된 섬”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그는 “방천은 우리 중국의 땅이다. 우리가 사람을 파견해 입주하지 않으면 다른데서 이 땅에 눈독 들일 것이다. 방천에 주둔부대를 파견하고 군중을 이주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에 연변군분구 변방퇀에서는 인력을 파견해 방천에 가도록 했다. 하지만 이민사업은 쉽지 않았다. 륙로 교통이 불편하고 생활하기 어려우며 자녀들의 교육 역시 문제로 되여 사람들은 방천에 가서 거주하는 데 우려를 표했다.

조남기는 직접 강태원을 찾아 담화하면서 그를 선두로 방천에 이주하도록 했다.

“아버지는 항미원조에 참가했고 로혁명가, 로당원으로 당성이 강하다. 아버지의 인솔하에 1965년 봄, 경신공사에서는 17호수에 달하는 당원 가족을 방천으로 이주시켰다.”

강태원의 둘째 아들 강동학이 말했다. 당시 그는 7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가 어머니한테 들은데 의하면 당시 조남기는  군중들이 방천에 간 후 생활물자를 전부 부대에서 순라정(巡逻艇)을 타고 수로로 운송해주었다고 했다. 이밖에 군분구 부대에서 문화수준이 높은 두명의 전사를 파견해 방천 주둔 분대에 가서 소학교를 세우고 이주한 자녀들의 교육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그 해 강동학은 권하에서 해방군 모터보트(汽艇)를 타고 방천으로 갔다.

변강을 공고히 하고 변방전사들과 함께 순라하다

강태원이 방천에 온 후 공사 인원들을 인솔해 황무지에 집을 짓고 자리를 잡았다. 부대에서는 방천에 간이 디젤유발전소를 세웠다. 대대는 행정제도를 회복하고 촌민들은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였다. 비록 생활, 생산조건이 렬악했지만 사원들은 포만된 정신상태로 임했다.

중국공산당 제9차 대표대회 소집 전, 변강을 공고히 하는 데 공을 세웠던 강태원은 당대표로 선발되였다. 대회가 페막된 후 강태원은 현에서 연설했는데 사원들과 지식청년들은 환호하며 그를 반겼다.

진보도(珍宝岛)사건 후 훈춘에 긴장한 분위기가 감돌자 강태원은 민병들을 인솔해 낮에는 소총과 수류탄을 등에 지고 농업생산을 하고 밤에는 등불을 들고 참호(战壕), 방공호를 만들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전쟁준비를 하여 방천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변방전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순라했다.

1983년 국가에서는 자금을 투입해 두만강에 제방뚝을 쌓았고 강태원은 사원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전했다. 양관평(洋馆坪) 뚝이 만들어지자 “고립된 섬” 방천은 대륙과 이어졌다. 현재국가급 풍경구로, 사회주의 새농촌으로 된 방천은 조국 동방의 변강에 우뚝 부상했다.

출처: 조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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