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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기 대박 영화 《八佰》: 영화보다 더 처참했던 력사의 현장!

2020년08월27일 17:20
출처: 중국조선어방송넷   조회수:943


영화가 끝나도 침묵속에서 자리를 뜨지 않는 관객들... 여기저기서 들리는 훌쩍이는 소리... 머리를 파묻고 통곡하는 90세 로병사... 이는 영화 《팔백(八佰)》관람이후의 영화관 장면이다.


최근 상영된 《팔백(八佰)》이라는 영화는 수많은 관중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항일전쟁시기 팔백 용사들이 상해의 사행창고를 사수하며 침략자들과 싸우는 이야기는 우리의 력사 교과에도 기록된 누구나 잘 아는 이야기이지만 참혹한 전쟁장면과 민족을 위해 서슴없이 목숨을 바치는 영웅들의 모습은 관객들의 큰 감동을 자아냈다.



심지어 일부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중국 영화사를 획분하는 중요한 징표라고 높게 평가했다.

이게 어디 영화냐? 력사 장면의 생중계이지... 많은 네티즌들은 이렇게 이 영화를 평가하고 있다.

영화보다 더욱 참혹했던 진실한 력사



1937년 8월13일 송호회전이 폭발했다. 이는 중국군이 일본침략자들과 맞서 벌인 첫 대형전역이였다.



사진원(谢晋元) 부퇀장

송호회전 후기 중국군은 서쪽으로 철퇴했다. 10월26일 제88사 262려 524단 사진원(谢晋元) 부퇀장은 상해지역 최후의 보루인 상해 ‘사행창고(四行仓库)’를 고수하며 대부대의 철수를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였다.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일제와 맞서 싸웠던 이 용사들은 실제로 어떤 참혹한 전투를 벌렸을가?

사행창고는 우리 400여명의 무덤이 될 것이다


1937년 송호회전 폭발전 상해 사행창고 실물

소주하 북안에 자리잡은 이 6층짜리 건물은 당시 상해 4개 은행이 공동으로 세운 영업소 창고였다.

사행창고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진원 부단장의 수하에는 17,18세의 소년들로 구성된 전투경험이 전혀 없는 400여명의 호북보안단 병사들이 고작이였다.

사진원 부단장은 병사들에게 “이곳은 우리 400여명의 무덤이다”라는 장엄한 명령을 내렸다.

“我们每个人,只要还有一人活着,这个仓库就不能让敌人占领。这是我们最后的阵地,是我们的坟墓!”

1937년 10월 27일 새벽, 일제는 소주하 일대를 불사르며 사행창고로 포위해 왔다. 오후 2시경 사격거리에 진입한 일제를 향해 사진원은 사격명령을 내렸다. 그후 옹근 나흘동안 밤낮이 따로없이 사진원과 그의 400여명 병사들은 일제와 사투를 벌렸다.



일제가 창고밑까지 침투해 폭탄으로 철문과 외벽을 폭파하려던 찰나 젊은 병사 진수생(陈树生)은 온몸에 수류탄을 두르고 적진으로 뛰여내렸다.



    희생 당시 그는 21살이였다. 모친에게 남긴 유서에 그는 “아들은 기꺼이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련다(舍生取义,儿所愿也)”고 적었다.

사행창고의 수비군은 몇명인가? 800명이다!

당시 사행창고 고수전을 지켜보던 한 외국기자는 상해 영국조계(英租界)를 통해 사진원 부단장에게 쪽지 한장을 보내왔다.

“사행창고를 고수하는 수비군은 몇명인가요?” - 쪽지내용

당시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또 일제의 기염을 꺾기 위해 사진원은 단호히 800명이라고 답했다.



이렇게 ‘800 용사’라는 칭호가 순식간에 퍼졌고 그들의 영웅 이야기는 전국 각지에 전해졌다.



영국조계에서 전쟁을 지켜보던 영국, 미국 기자들은 “영국조계의 중국 백성들은 사처에 날리는 파편도 아랑곳 하지 않고 중국군을 응원하고 있다. 적군을 발견하면 큰 소리로 아군에게 통지하고 흑판에 글을 써 전사들에게 알려주었다.”



4일간의 격전은 영국조계 수만명 중국 백성들의 성원과 지지를 받았다. 전지봉사대 동자군 양혜민은 생명 위험도 마다하고 강을 건너 사진원의 손에 국기 한폭을 전했다. 병사들은 국기와 생사를 함께하고 절대 투항하지 않으며 적을 소멸할 것이라 소리높이 웨쳤다.

투항하라! 명령 없으면 절대 철수 못한다!

4일간 사진원은 부대를 거느리고 사행창고에서 일제의 진공을 수십차 격퇴하고 200여명의 적군을 사살했다. 사진원의 부대는 9명이 전사하고 20여명이 부상을 입었을 뿐이였다.

완강한 저항에 일본침략군은 영국조계의 영국군을 통해 사진원에게 투항을 권장하며 장병들의 인신안전을 보장하겠다고 했다. 이에 사진원은 “령혼은 우리의 몸을 떠날 수 있지만 총은 우리의 손에서 떨어질 수 없다”라고 결사적인 태도를 표했다.

명령: 철퇴!

1937년 10월30일 장개석은 사진원에게 “사행창고의 저격임무를 완성했으니 영광스러운 철수”를 명령했다.

마지막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적을 물리치겠다고 선서했던 사진원과 그의 장병들은 철퇴 명령을 받고 분노했지만 군령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1937년 10월31일밤 사진원은 부대를 거느리고 영국조계로 철퇴했다. “팔백 용사”들이 이르는 곳마다 그들을 반기는 백성들의 대오가 끊기질 않았다.



비운의 영웅

영국조계를 통해 철퇴한 그들은 조계에 의해 연금당했다. 당시 일본군의 위협으로 조계에서는 언약대로 “팔백 용사”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연금했다.


1940년3월 왕정위가 위국민정권을 세운후 사진원에게 높은 관직을 주며 투항을 권했지만 그는 역적이라고 왕정위를 면박했다.

1941년 4월25일 새벽5시 사진원은 적에게 수매된 반역자에 의해 살해되였다. 영웅의 죽음은 조계 민중들의 극대한 분노를 일으켰고 그의 장례식에 모인 추도객은 30여만명에 달했다.


중국조선어방송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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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민연]
태그: 1937  400  10  800  谢晋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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