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기억속의 연변] 35년 전 "결혼식"...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70년 기억속의 연변] 35년 전 "결혼식"...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70년 기억속의 연변] 1981년 , 인기돌풍 일으키다!20세기 80년대 노래 가 연변에서 탄생됐다. 흥이 돋는 노래가락과 소박한 내용으로 대중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은 이 노래...
1960년대, "공업은 대경을 따라배우고, 농업은 대채를 따라배우며, 전국적으로 인민해방군을 따라배우자"는 새로운 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전국 인민이 간고분투하여 락후한 면모를 개변하려고 다짐하는 분위기 속에서 변경에 ...
”도시건설의 발전과 더불어 주덕해의 념원은 현실로 되여 오늘날 연변병원은 연길시의 중심지역에 위치하게 되였을 뿐만아니라 연변지역에서 유일한 의료, 림상, 교수, 과학연구, 예방보건을 일체화한 3급 갑등 현대화 종합병원으로 ...
[70년 기억속의 연변] 2017년 동북범, 표범 국가공원이 성립되다2016년 12월 5일 중앙전면심화개혁지도소조 제30차 회의에서 을 통과하고 길림성과 흑룡강성에 동북범, 표범 국가...
2018년 2월 2일, 주당위는 전 주 관광흥주동원대회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성당위 상무위원이며 주당위 서기인 강치영은 전 주 상하의 힘을 모아 관광업을 발전시킬 것을 제기하였다. 관광흥주 전략포치에 따라 주당위, 주정부는 ...
2015년 9월 20일 오전, 장훈도시간선(长珲城际) 첫 렬차가 발차된 훈춘시의 승강장은 전에없이 들끓었다. 첫 렬차가 천천히 플랫폼을 벗어나면서 "동북 가장 아름다운 고속철도"라 불리는 장훈도시간선이 정식으로 개통되였고 훈...
2013년 6월 제2회 중국음식점문화축제 및 제1회 중국국수문화축제에서 상무부, 중국음식점협회가 처음으로 선정한 “중국 10대 국수”에 길림 연길랭면이 입선되고 연길진달래랭면이 “중국10대국수 명가”로 선정되였으며 전승인 김...
연길시 택시의 발전과 변천은 우리가 살고있는 이 도시의 문명과 진보를 견증하고, 사람들의 생활 수준 향상과 도시의 빠른 발전을 견증한다. 2004년 1월 1일부터 연길시 택시 경영권을 유상 사용하게 되였다. 경영권을 보유한 ...
이 채색사진은 제1회 연변룡정사과배축제 개막식 현장을 촬영한 모습이다. 사진을 보면 주석대 우에는 현수막이 걸려져 있고 량쪽에는 채색기발이 나붓기고 있다. 또 체육장에는 량손에 부채를 쥐고 춤추고 있는 여러명의 조선족민족복장...
[70년 기억속의 연변] 1995년 제1회 두만강투자무역상담회 괄목할만한 성과 거두어1995년 10월 10일부터 15일까지 우리 주 수부도시 연길에서 중국 두만강지역 국제투자무역상담회가 개최되였다. 이는 보통 의미의 투자무역...
청나라 선통원년 11월 15일(기 1909년 12월 27일) 연변에 세관이 생겼는데 바로 청정부가 설치한 훈춘총관과 산하에 설치된 “룡정촌 분관”인데 “훈연분관”으로 통칭했다. 1924년 8월, 두 관문의 주차 관계가 뒤바뀌...
연길서시장은 수많은 연변사람들의 공통된 기억이다. 서시장의 변천은 연변의 변천과 발전을 더욱 잘 보여준다.이곳은 연변사람들의 공통된 기억!연길서시장이 위치한 곳은 일찍 20세기 30년대에 이미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 모여...
[70년 기억속의 연변] 등소평동지, 연변을 위해 제사(题词)를 하다1983년 8월 13일 중국사회주의 개혁개방 및 현대화건설의 총 설계사 등소평동지가 79세의 고령에 장백산에 올라 연변을 위해 제사해줌으로써 변강인민들에게 ...
전 로인들 명절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제안은 동성공사 당위원회에 의해 채택되였다.동성공사는 행사방안을 상급에 재빨리 보고했다. 그들은 "로인독보조"를 "로인협회"로 바꾸고 성립일을 로인절로 정했다. 성립시간을 ...
1969년 3월 1일, 첫번째 2000여명에 달하는 상해시 초중, 고중 졸업생들이 두번에 나누어 연변으로 하향왔다. 훈춘현으로 오는 1000여명의 지식청년들이 전용렬차를 타고 상해팽포(上海彭浦)역에서 출발해 장춘에서 차를 갈...
“붉은 해 솟았네, 천리변강 비추네, 장백산아래 사과배 열리고 해란강변 벼꽃 피네…”1966년 김봉호 작곡, 한윤호 작사로 된 노래 는 전국에 울러퍼져 반세기동안 경전으로 되였다.(-붉은 해 변강 ...
[70년 기억속의 연변] 1965년 당원가족 17가구, 방천에 이주방천촌은 중조로 세개 나라 접경지대에 위치해있고 중국 “동방제1촌”으로 불리운다. 하지만 이 촌에는 예전에 촌민이 살지 않았다.새중국이 성립된 후 경신공사 군...
지난 10월 1일, 집에서 수도 북경에서 거행된 새 중국 창건 70돐 맞이 열병식 생중계를 관람하는 룡정시 로투구진 로서촌의 로민병 리종률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보무당당 천안문광장을 지나는 열병대오를 보면서 리종률은 천...
1951년 8월 연변 최초의 전문 농촌영화상영대-연길현 중쏘우호협회상영대가 발족했다. 이 상영대는 대장 리흥석, 영사원 최학수, 발전원 겸 자동차운전수 한복수, 해설원 김용으로 구성되였다. 상영대는 당시 전 주 각지에서 활약...
[70년 기억속의 연변] 주은래총리 조선어로 안부를 전하다이 오래된 흑백사진은 1962년 6월 22일에 촬영한 것으로 변강인민들에 대한 주은래총리의 사랑을 기록했다.당시 연변에서 시찰중이던 주총리는 주당위 뒤 울안에서 전 주...
[70년 기억속의 연변] "중형땅크"로 불리웠던 리광수
이 사진은 1954년 7월에 찍은 것으로 연길시 장백향 신풍촌 인민대표대회 선거현장이다. 사진속 왼쪽 사람이 바로 저명한 농민벼재배전문가인 최죽송이다. 자치주가 갓 창립되였을때 연변은 벼재배기술이 락후했는데 생산량이 매우 낮...
1952년, 나젊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이제 막 창건 3돐을 맞이할 시기였다. 그해, 장백산 기슭의 안도 경내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이 적의 간첩 섬멸전을 벌였는데 이 전투는 그후 장춘영화제작소에서 촬영한 영화 '고즈넉한 산림'(寂静...
조선족청년 려근택은 연길현 동성향 해란촌 사람이다. 20세기 50,60년대, 려근택은 전국 귀향지식청년 로력모범이자 길림성의 유명한 농업전문가였다. 1951년 봄, 려근택은 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에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였다...
과 4개월 뒤, 마침내 무대표현에 적합한 농악무를 창작해 민간오락무용을 성공적으로 무대예술로 개조했다.개조된 농악무는 민간오락 무용 중의 큰 북, 작은 북, 둥근 북과 상모 등을 통합하여 무용수단으로 전환하였고 조선족 전통의...
1952년, 조선전장에서 밀려 후퇴중이던 미군은 일본 파쑈처럼 비렬하게 세균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해 2월, 연길현 광개구에서는 탄저균과 페스트균을 가진 독벌레가 발견되고 왕청, 안도, 화룡, 훈춘 등 지에서도 의심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전신인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인민정부가 설립됐다. 아래는 사업일군이 구정부 문앞에서 간판을 거는 력사적인 순간을 기록한 옛사진이다.
1950년, 전쟁의 불길이 두만강변까지 만연되고 미군 전투기가 여러 차례 우리 나라 변경 령공에 침입해 도문, 룡정시에 폭탄을 투하했는데 화룡현 용화구 부암동 및 숭선구 고성마을 등 지역을 폭격했고 우리의 변경소학교를 폭파했...
1950년 국경절기간, 중남해 회인당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1주년 기념야회가 펼쳐졌다. 몽골족, 회족, 장족, 위글족, 조선족 등 42개 소수민족 대표 158명이 모택동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과 함께 이날 야회에 출석했다.
올해는 새 중국 창건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70년래 우리 나라는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왔고 인민군중의 생활은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공화국의 성장과 더불어 연변의 제반 사업도 대변혁을 가져왔는바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