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09월07일 13:46
최근, 6개 부문에서
새 시대 농촌 교원대오 건설을
강화할 데 관한 의견을 내고
향후 3년 내지 5년 내에
농촌 교원의 지위를 대폭 향상시키고
대우를 효과적으로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근 300 만명 농촌 교원이
기층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년간 약 4만 5천명
국비 사범생들이 시골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분필 한 자루, 청렴결백한 자세로
강단에 서는 동시에
사계절 내내
밭일에서도 손을 떼지 못한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산을 떠날 수 있는 길을 닦아 주었고
수많은 아이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01
산속의 녀자아이들에게
학습기회를 주기 위해
그는 혼신을 불태웠다
올해 전국 첫 전액무료 공립 녀자고중인
운남 려강 화평녀자고중의
159 명 학생이 대학입시에 참가하였다.
그중 150 명이 본과선을 넘었고
본과 입학률은 94.3%
이 같은 훌륭한 성적은
학교 창시자이자 교장인
올해 63세 장계매 선생님의
로고를 떠날 수 없다.
장계매는 17살
운남 국경지역에 지원교사로 가
려강시 화평현 민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녀자아이들의 종착지는
시집가는 것이였기때문에
공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다.
“저도 공부하고 싶어요.
하지만 가난때문에 집에서는
시집을 보내려 합니다.“
녀자아이가 무심코 한 말이
장계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녀자아이들에게 학습의 기회를 주자!
이런 신념이 이때로부터
그녀의 마음속에 뿌리내렸다.
남편을 일찍 잃은 아픔과
질병으로 인한 고통도
그녀의 의지를 굽히지 못했다.
2002년부터 장계매는
사방으로 뛰여다니면서
“구걸하다싶이” 경비를 모았다.
2008년 화평 녀자고급중학교가
드디어 건설되였다.
지난 12년 동안, 약 2천명 산속 녀자아이들이
이곳에서 대학의 꿈을 이뤘다.
장계매는 말한다.
아이들이 멀리 높이 날수 있길 바랍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사회와 나라를 위해 봉사할겁니다.
아이들이 앞으로 나보다 더
잘 살고 행복하면 만족입니다.
02
“제가 숨이 붙어있는 한
아이들이 공부할 수 없는 일이
절대 없을겁니다.”
안휘 화현 복진촌에는
“나홀로 어린이 집”이 있다.
92세 정년퇴직교원 엽련핑은 이미
20년동안 이곳에서
천여명 아이들을 도와
어문과 영어 과외를 해주고 있다.
그것도 보수 한 푼없이 무상으로 가르친다.
그는
농촌교육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것이
가장 안쓰럽다.
자신에겐 면 한 그릇,
광천수 한 병도 아까워
쉽게 주머니를 열지 못하지만
아이들에겐 아낌없이 사비를 다 털어낸다.
그는
교육은 농사를 짓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씨앗을 뿌려 풍작을 거두었으니,
누가 뭐랄 것 없다.
좋은 일만 하고, 앞날에 대해 묻지 마라.
03
외팔로 세 명 학생의 지킴이로
심산속에 뿌리를 내린
외팔 교사
사천성 바중시 바주구 량영진에는
흑담촌 소학교가 있다.
그곳에는 교사 두수란과 어린이 3명 뿐이다.
6 살 되던 해 두수란은
불의의 사고로 오른팔을 잃었다.
하지만 그녀는 악착스레
고중까지 학업을 완성하였다.
수업시간이면
그는 왼손으로 흑판에 글자를 쓰지만,
정연하고 힘이 있다.
그러기까지 수십년의 노력이 필요했다.
대학에 가지 못하고,
산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두수란의 유감이다.
이제는,
더 많은 아이들이 산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그의 평생의 목표로 되였다.
“저는 바로 이 산속에서 자랐습니다.
제가 가르친 아이들에게
바깥세상 구경을 시켜주고 싶습니다.
공부를 잘하면 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바깥 세계도 구경할 수 있고요.”
04
시를 가르치는 국어 선생님
축구팀 양성
귀주성 대강진의 한 농촌 소학교에는
“원보”라고 불리는 축구팀이 있다.
이 축구팀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많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들의 코치는 서소위
이 학교 국어 선생님이다.
서소위는 2013년에 원보 소학교에 왔고
학교 개교 이래 첫 지원교사이다.
아이들에게 영양 보충을 시켜주기 위해
서소위는
학생 집의 2층 건물을 축구팀 기숙사로 빌리고
일정 기간마다
진에 가서 일용품을 구매하였다.
서소위는,
등수를 따내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다만 부모가 곁에 없는 아이들에게
팀원들이 있으니,
어디를 가도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05
대를 이어오면서
농촌 학생들의 꿈을 이루어주어
1981년 고중을 졸업할 때
호청여의 가장 큰 꿈은 하북 농촌을 떠나
군인이 되는 것이였다.
그때 마을에는 선생님이 없었다.
아버지 호경서는 아들에게
“남아서 애들을 가르치라”는
기대를 전했다.
아버지의 기대를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사실 호청여의 아버지는 고중을 졸업할 때
산골을 떠나 대학시험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역시 아버지의 만류로
농촌에 남아 교편을 잡았다.
비록 농촌에 남기로 했지만
생활이 여간만 어렵지 않았다.
호청여는 장사를 해보고 싶었다.
다음 날, 호청여는 무거운 심정을 안고
학생들에게 마지막 수업을 해주러 갔다.
“얘들아,
앞으로 더는 가르칠 수 없을 것 같구나…”
“선생님, 가지 마세요. 가시면 안돼요...”
아이들이 울고 , 호청여도 울었다.
그후로 그는
다시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바깥세상이 아무리 눈부시고 번화해도
저 교탁만치 못하다.
호청여 일가는 4 대를 이어가며
20 여명이 교사직에 종사했다.
할아버지 세대로부터 시작해
온 가족이 가르친 학생은
2만명을 넘는다.
인생에는 여러가지 선택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평생동안
평범함과 외로움, 헌신을 선택했다.
산속의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바깥세상을 볼 수 있게
밝은 미래를
가질 수 있게 하려는 생각이 전부였다.
인생에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교사절에 즈음해
위대한 선생님들께
경의를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