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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명인] 11억 영화 “悬崖之上” 각본 전용선: 우리 민족의 이야기를 더 많이 전하고 싶습니다

2021년06월11일 09:12
출처: 중국조선어방송넷  

영화 “悬崖之上” ... 중국 최고의 영화감독 장예모가 연출하고 중국 최고의 실력파 배우 ‘张译, 于和伟, 秦海璐, 朱亚文, 刘浩存, 倪大红, 李乃文’ 등이 주역을 맡은 영화가 최근 상영되여 큰 화제를 모았다.

지난 세기 30년대 쏘련에서 훈련을 받은 4명의 공산당 특공대가 일제 죄증을 지목할 증인을 구출하기 위한 “乌特拉” 비밀작전이 할빈에서 전개되고... 락하산을 타고 흰눈이 뒤덮인 동북 땅에 내리는 순간부터 그들의 운명은 “벼랑끝에 몰리게” 되였다. 일류 배우들의 뛰여난 연기와 일류 감독의 예리한 감성으로 영화는 상영(4월30일)전부터 관객들의 큰 기대를 모았다. “강력 추천도 모자라 강제 추천까지 하고 싶다”는 네티즌들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영화는 11억 흥행수익을 올리며 10억대 흥행수익을 돌파한 제86번째 중국 영화로 기록되였다. 

영화 각본 조선족 작가 전용선 창작

이 영화의 각본 작가를 검색하면 전용선(全勇先)이라는 이름이 검색되는데 놀랍게도 그는 조선족 작가였다. 비록 우리말로 작품을 발표하지 않아 조선족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겠으나 전용선 작가는 중국 문학계 특히 영화계에서 유명한 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출장을 마치고 막 북경에 돌아온 전용선 작가는 피곤하고 바쁜 와중에도 본방송국의 인터뷰를 받아 주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친근한 느낌의 외모를 가진 전용선 작가의 이야기는 온화한 그의 이미지와 달리 큰 반전이 있었다.한마디로 그의 인생은 “생각밖의 도전을 거듭”하는 과정이였다. 

항상 제일 먼저 시험지를 제출했던 학생

1942년 전용선의 할아버지 전도준 씨는 일제의 탄압으로 허덕이는 고향을 떠나 할머니 리신금 씨와 두 아들을 데리고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했다. 그들이 이주했던 곳은 흑룡강 오상시 배음하(背荫河)였다. 이 곳은 세균전으로 악명이 자자한 일제 731부대의 주둔지로 영화에서 등장하는 지명 “背荫河”는 바로 이곳을 가리킨다고 한다. 

전용선 작가의 아버지 전광규, 어머니 김위경

1966년 1월11일 흑룡강성 의춘시에서 태여난 전용선은 경찰이였던 엄격한 아버지(전광규)와 자상한 어머니(김위경)의 슬하에서 자랐다. 

너 커서 뭐가 되고 싶니?식당에서 밥하고 싶어요! 가수가 되고 싶어요! 세계 10대 미스터리를 밝히고 싶어요!

다같이 가난했던 시절에 태여난 그는 어릴 적 식당 주방에서 밥을 하는 퉁퉁한 주방장이 너무 부러웠다고 한다. 매일마다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게 어린 시절의 작은 소망이였다고 한다. 그후 18살 되던 해 가수가 되는 게 꿈이여서 기타를 메고 가목사의 크고작은 골목들을 누비기도 했고 또 과학으로도 풀지 못한 세계 10대 미스터리에 관심을 가지고 신농가(神农架)의 심산 속에서 야인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아버지, 삼촌과 함께

전용선 작가는 “나는 어릴 적 어른의 말을 잘 듣는 아이가 아니였다”며 특히 공부하기 싫어하고 놀음에 탐했다고 한다. 비록 그가 좋아하는 물리와 어문 성적은 아주 높았지만 기타 성적은 형편없었다고 한다. 그와 친한 한 고중 동창생은 지금도 그를 만나면 “고중 1학년 때 내가 전교 1등이였고 전용선이 전교 꼴지였다”는 롱담을 자주 던지기도 했다.      아버지가 어렵게 구한 복습자료를 모두 동학들에게 “양보”했던 그는 대학입시에서 탈락되였다. 그해가 바로 1984년이였다. 

야인 찾으러 신농가(神农架) 심산 속으로 출발

1984년 18살 고중을 졸업한 전용선은 대학입시에서 실패하고 가목사시의 한 목재공장에 출근하게 되였다. 반복되는 고된 일상에서 그는 또 새로운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세계 10대 미스터리에 관심을 가졌으며 중국에서 야인(野人)이 출몰한다는 신농가에 농후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야인을 찾으러 신농가로 가겠다”는 아들의 말을 들은 그의 부친은 생각밖으로 아들의 선택을 묵묵히 접수했다. 그냥 “꼭 안전에 조심하라”는 당부만 여러번 했다고 한다. 

신농가의 심산 속에서 동료와 함께고찰중인 전용선 렵총, 사냥개, 모닥불...모험 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한다.

당시 “중국야인고찰연구회”라는 민간 기구와 련락을 가진 그는 커다란 가방을 메고 1985년 1월 신농가로 향했다. 신농가의 대룡담(大龙潭)에 도착한 그는 호진림이라고 부르는 부부가 운영하는 고찰기지를 찾아갔다. 앳된 젊은이가 불쑥 찾아오자 비록 황당했지만 심산 속이였던지라 그를 하루저녁만 류숙시켰다. 이튿날 전용선의 용기와 재치에 감복한 호진림 부부는 그를 림시 보조 신분으로 고찰기지에 남아있게 했다. 그들 부부를 따라 여러가지 야외고찰을 하며 긴 시간을 보내던 전용선은 1986년 신농가의 심산 속에서 20살 생일을 쇠였다. 

신농가의 심산 속에서 20살 생일을...

“지금이나 그때나 야인을 찾으러 다닌다고 하면 모두 이상한 눈길로 보았다”고 한다. 비록 몇년간 심산 속을 누비며 야인을 찾아 헤맸지만 야인은 결국 찾지 못하고 그의 웅대했던 세계 미스터리를 밝히겠다는 꿈은 무산되였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위험에 빠진 촌민을 구하며 중국청년보에서 “野人没发现 悬崖救亲人”라는 제목으로 그의 영웅사적을 보도하며 그는 한때 신농가의 영웅인물이 되기도 했다. 

반년간의 한국행...고달프고 힘든 나날이였지만 영화의 매력을 알게 해

5년간의 떠돌이 생활을 마친 전용선은 1991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중로변경 흑룡강 학강의 학북(鹤北)림업국에서 일자리를 찾은 그는 1년간 안일한 나날을 보내게 되였다. 1992년 중국과 한국이 외교관계를 수립하며 전용선은 또 어머니의 친척관계를 리용해 1992년 여름 한국으로 떠났다. 식습관도 맞지 않고 반복되는 고된 일에 지친 그는 반년 뒤 귀국길에 올랐다. 비록 그닥 기분좋은 한국행은 아니였지만 서방의 유명한 영화들을 대량으로 접촉하며 그는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93년 한국에서 귀국한 전용선은 삼강석간신문사(三江晚报)에 출근하게 되였다. 어릴 적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그는 한국에서 세계 유명 영화들을 접촉한 후 영화에 대해 뭔가를 배우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반년후 그는 소원대로 북경영화학원에 입학하게 되였다. 북경 영화학원에서 그는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인식하게 되였다. 

프리랜서 작가에서 영화극본 작가로 

삼강석간신문에서 기자부 주임으로 있었던 그는 2001년 사직하고 북경으로 오게 되였고 더는 기자가 아닌 프리랜서 작가로 창작을 시작했다. 

1984년 고중을 졸업하던 해 북대황잡지에  “雨雾中的小路”라는 작품을 발표하며 그의 창작인생이 시작되였다고 한다. 이 처녀작으로 그는 문학청년이라는 평판을 듣기도 했다. 

그후 1997년 장편시 《回家》가 북방문학상을 받았고 1999년 “인민문학”에 단편소설《东北恨事》을 발표했으며 2000년에 와서 단편소설집《恨事》를 출간했다. 2002년에 중편소설《妹妹》를 발표하여 북경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55주년 우수작품상도 받았고 같은 해 장편소설《独身者》를 발표해 흑룡강 제1회 소수민족문학 1등상을 수상했으며 2014년에는 장편소설《昭和十八年》을 발표하기도 했다. 

드라마《母亲活着真好》

꿈을 안고 북경에서 프리랜서로 창작을 시작한 전용선은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후 우연한 기회에 석종산의 소설을 개편해 촬영한 드라마《母亲活着真好》의 각본 개편 작업을 맡게 되였다. 그후 이 드라마가 2003년 시청률 최고치를 기록했고 전용선이라는 이름도 점차 업계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후 2007년 그는 드라마《雪狼》의 각본을 창작했고 2010년에는 드라마《岁月》, 2012년에는 드라마《悬崖》의 각본을 창작했다. 각본작가는 일반적으로 관중과 언론의 눈길을 끌지 못해 현란한 무대 조명에 가려진 영웅들이라고 불리우지만 전용선은 언론과 관중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제18회 상해 텔레비죤 페스티벌(上海电视节)에서최우수 극작가 수상

영화 “悬崖之上” 개봉식에서 장예모 감독은 각본을 받는 순간 매료되였다며 전용선의 작품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후 수많은 언론매체들이 그를 인터뷰하며 전용선의 이름은 이 영화와 함께 관중들에게 기억되였다. 

최신 소식에 따르면 전용선이 창작한 이 영화 각본은 또 드라마로 개편되여 올해 년말부터 촬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유명한 실력파 배우 진도명(陈道明)과 손홍뢰(孙红雷)가 합류하며 더욱 많은 네티즌들의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중국에서 확 유명해진 윤동주의 시 “별헤는 밤”조선어에 익숙하지도 않으며 왜 이걸 번역?

윤동주라는 이름은 우리 민족에게는 절대 생소하지 않다. 일제의 탄압에 맞서 투쟁을 하던 유명 시인으로 암흑 속에서 절개를 지킨 투사이다. 우리 민족에게 널리 알려진 이 시인의 이름은 사실 중국 기타 민족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였다.       하지만 요즘 인터넷에 윤동주라고 검색하면 중국어로 된 윤동주 시인에 대한 여러 언론사들의 기사가 뜬다. 新京报, 中国新闻,腾讯网,新浪新闻, 搜狐网,网易网 등 언론과 수많은 독자들의 개인계정이 작성한 기사들이 수두룩하다. 윤동주의 이름과 함께 검색되는 이름은 바로 전용선이였다. 

전용선이 1995년 장백산잡지사에 문학상을 받으러 갔을 때 우연히 조선어로 된 출판물 한권을 선물 받게 되였다. 집에 돌아온 후 그의 어머니는 이 책을 보며 그에게 윤동주라는 시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비록 처음 듣는 시였지만 령혼을 울려주는 힘과 정서를 느끼게 되였고 이 천재시인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였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어가 익숙하지 않다보니 듣고 싶을 때마다 어머니에게 부탁했었다고 한다.       2015년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10주년 때 단군문학상을 받으러 룡정에 갔던 전용선 작가는 윤동주 시인을 떠올리고 그의 생가를 방문했다. 룡정을 떠날 때 그는 윤동시의 시를 한어로 번역해 출판하려는 결심을 내렸다. 

한어로 소설과 시를 써 많은 상들을 받았던 전용선 작가는 그의 누나 전명란씨와 함께 윤동주의 시 91수와 산문 4편을 한어로 번역해 “数星星的夜”라는 작품집을 발표했다.       스마트폰으로 열독하는 시대에 시집을 발표해도 구독자가 없을 것이라며 말리는 주변인들도 많았지만 그는 결연히 이 책을 출판했다. 하지만 생각 밖에 작품집이 출판된 후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고 “悬崖之上”와 관련해 인터뷰하러 왔던 기자들마저도 오히려 이 작품집에 관심을 가지고 기사에 영화보다 이 작품집에 대한 인터뷰 내용을 더 많이 담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북경 SKP-S RENDEZ-VOUS서점에서 진행된

“被遗忘的天才—朝鲜族诗人尹东柱诗歌鉴赏会”

이 책을 출판하고 나서 조선어에 익숙하지 않은 조선족으로서 왜 이 시를 한어로 번역했는가는 질문을 간혹 받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저의 조선어 수준은 5살짜리 어린 애와 같습니다. 하지만 5살짜리 애와 같은 조선어 수준일지라도 같은 민족으로서 윤동주 시의 온도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고 또 시에 닮긴 민족적인 정감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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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문화]
태그: 10  悬崖  1984  18  恨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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